오래전, 과거 시인과 묵객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반드시 거쳐 갔다는 풍광이 뛰어난 영산(靈山)인 월출산을 명상기도하러 갔다.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라는 애절한 가사의 《낭주골 처녀》란 노래가 생각나는 산이다. 누구나 소원이 있기 마련 아니던가?
선인들은 풍수에 의하여 지명을 만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온천으로 유명한 유성(流星)과 온양(溫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성은 곧 은하수가 흐른다는 뜻이며 또 온양에서 양은 풍수에서는 양은 물을 의미하고 산은 음을 의미하니 당연히 온천이 나온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천하의 명산은 저마다 기를 잘 받는 시간대가 있으니 월출산(月出山)은 지명에 암시하는 바와 같이 달이 출현할 때 가장 기도발이 잘 받으며 이와 달리 계룡산이면 진시 및 첫 닭이 우는 시간이 가장 영험을 얻기에 좋다.
그리고 산은 각자 지기(地氣)가 다르니 그 나타나는 영험도 다른데 예를 들면 북한산은 관운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산으로 유명하다. 풍수에 관심이 있었던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연하게도 주로 북한산을 등반하였다고 전해진다. 재물운을 불러일으키는 서울 근교의 산은 아마도 우면산 일 것이다. 만일 북한산에 죽치고 앉아서 손님이 개떼같이 몰려들게 해달라고 쌔리 빌어 본들 주파수가 맞지 않는데 어찌 영통(靈通)할 것이며 또 영험을 얻겠는가?
월출산은 소원을 빌기에 좋은 산이며 그 시간대는 달이 뜰 때가 적합하니 야영을 하기 위하여 텐트를 준비하여 올라갔다. 풍수상 명산이면 그 지역 어느 장소나 다 좋은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에서도 혈자리가 있다. 월출산은 8부 능선 쯤에 위치하는 마애불이 바로 그 명당자리이다.
천왕봉에 올라가서 명상하다가 저녁에 내려와서 마애불로 갔다. 마애불 바로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서 텐트치기에 좋다. 요즈음은 국립공원 내에서 불법 야영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 당시는 그냥 대충 넘어갔다. 드디어 보름 달이 뜨고 달빛에 은은하게 비치는 마애불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 마애불을 마주하여 명상에 들어가니 무아지경에 빠져들며 무언가를 빌려고 왔건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싶어진다. 신라 말기에 조성된 이 마애불은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중생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을 것이며 이를 들어 주느라 아마 피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맞이하는 상쾌한 바람과 더불어 번뇌장을 녹일 듯한 강렬한 햇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달은 음이라서 달빛은 은은하며 태양은 양이라서 강렬하니 이 둘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무언가를 생산하지 못한다.
만일 월출산에서 밤을 지새울 수 있다면 은은한 달빛과 강렬한 햇빛을 동시에 받아들여서 내면의 기를 보충하는 영양제를 섭취하는 것과 같으리라. 해외 명산은 웅장하고 장엄하며 경이로워서 사람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하나 역시 애착이 가고 정감 어린 것은 국내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