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수》는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유백온의 저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확실치 않으며 후에 유백온이 이름을 이룬 후에 후대에서 유백온의 유명세를 빌려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다만 《명사(明史)》의 「예문지(藝文志)」에서 적천수가 유백온의 저술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그리 추측한다. 하지만 《적천수》는 응당 명대 이전에 이미 나돌던 것으로 보여 지며 원래의 적천수원문은 이미 실전(失傳)되고 본문에 나오는 적천수 원주(原注)는 후세 사람들이 첨부한 듯하다.
그리하여 원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추론이 분분하며 혹자는 명대초엽 명태종의 시대에 어느 무명인사에 의해 저술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미 6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자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완벽한 고증(考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 당시 《적천수》는 수초본(手抄本)과 석인본(石印本)의 두 개의 판본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현재 유통되고 있는 《적천수》의 판본은 석인본(石印本)에 의거하고 있다. 근대에 있어서는 명리학계의 현인(賢人)이라고 할 수 있는 원수산과 서락오가 《적천수》를 출판하였는데 문인적인 취향을 가진 원수산이 임철초가 증주(增注)한 「적천수」와 진소암의 「적천수집요」를 찬집(撰輯)하여 「적천수천미」를 출간하였고 이어서 서락오가 임철초의 증주(增注)에 만족하지 않고 「적천수천미」에서 나오는 적천수원문에 삽입된 원주(原注)와 임철초의 주석을 전부 삭제하고 또한 예문도 일부분을 첨삭하여 자신의 주석과 예문으로 대체하여 「적천수징의」를 출판하였다.
그 후로 《적천수》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출간되었지만 당분간은 「적천수천미」와 「적천수징의」를 능가할 만한 서적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겨진다.
요즈음은 서락오의 「적천수징의」를 많이 읽는 추세인데 그 이유는 임철초의 적천수예문에 나오는 인물은 이미 200백년이나 지나서 현 시대상황에 안 맞아 현장감이 다소 떨어지며 실례의 통변에 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비해 서락오가 보완한 예문에 나오는 인물은 비교적 근대의 실존인물로 능히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할 뿐 아니라 서락오가 이전까지 난강망、궁통보감、조화현약으로 명명되며 책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초본(抄本)으로 시중에 나돌던 많은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조화원약평주」를 출판하며 조후용신에 대한 적용을 명확히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진다.
「적천수천미」는 64장의 표제와 매 표제마다 다만 2개 내지 10개의 간단한 시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단지 추상적인 비유와 은유로써 그러한 문장들 가운데 팔자를 언급하고 있어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천수》가 근대에 이르러 자평학 중에서 중요시 되고 있는 이유는 사주통변에 있어서 기계론적인 격국에 얽매이지 않고 음양오행의 합충변화로써 입체적으로 팔자를 분석하고 있으며 특히 임철초의 「적천수」는 수많은 예문을 통해 희용신을 잡는 방법을 보다 수월하게 익히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주로 변격을 다루며 희용신 또한 격국용신이나 조후용신과 달라서 운의 흐름에서 또한 이와는 길흉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