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이 문자로 되려면 象으로써 근본이 되니 고로 《설괘전》에서는 오로지 象을 말하였고 이로써 그 계통을 명시하였으며 《구가역》의 일상(逸象)과 《맹씨역》의 일상(逸象)은 거듭하여 그 단서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象을 학습하는 것이 깊고 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계사전》에서는 이르길 “《易》이란 象이다. 팔괘가 배열을 이루면 象은 그 중에 있다”고 하였다. 이런 고로 象은 모두 성인이 천하를 깊숙하게 살펴서 이로써 그 형용(形容)하는 바에 의거한다. 象은 그 사물의 마땅함이니 고로 이를 象이라고 한다. 또한 象이란 형상인데 이 형상은 만물의 형상뿐만 아니라 만사(萬事) 또한 형상이 없을 수가 없다.
《설괘전》에서 말한 바 “乾은 굳건함이며 坤은 유순함이며 모든 일이 바로 이러하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길 “象으로써 일과 사람의 도량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이르길 “象을 세우면 이로써 뜻을 다한다”고 하였다.
대개 천하의 만물(萬物)과 만사(萬事)적인 뜻은 역상(易象)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고로 역상은 능히 뜻을 다한다. 이는 象을 세우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말하며 또한 성인은 象을 관찰하여 설괘(說卦)하였으니 어찌 계사(繫辭)는 길흉이 분명하다. 무릇 象을 보고 계사(繫辭)한즉 지금의 역사(易辭)이며 진실로 모두 옛 성인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괘상(卦象)을 주시하게 된 것이 《易》의 괘사와 효사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미 象으로 인하여 생긴 괘효사를 해석하되 象과 괘효사를 분리하고자 욕구하였으나 다만 그 괘효사가 무슨 사물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능히 알지 못하였으며 지혜로운 자 조차 결정할 수가 없었다. 주자가 이르길 “먼저 상수(象數)를 보면 바야흐로 이치를 설득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즉 일은 아무것도 실증하지 못하니 이치에 닿지 않고 어긋나기 쉽다”고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종류에 대한 명확한 견해가 주자의 만년에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추후에 《주역본의》를 보충하지 못하였다. 대개 《주역》을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시키는 일은 왕필에 이르러 하나의 관건(關鍵)이 되었다. 왕필은 이전의 《주역》에 주(註)를 단 자이며 象을 전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의리학적인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초씨역림》은 곧 생성되는 한 글자라도 象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또한 《易》에서 곧 象을 사용하여 복상(覆象)과 복상(伏象)의 법을 이용하였으니 《易》은 象에서 명시되어 나오는 것에 의거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춘추시대에 《주역》을 말한 사람은 한 글자라도 象을 근거로 하였으며 또한 역괘(易卦)를 사용하면 정괘(正卦)를 사용하되 착괘를 사용하는 법 또한 격식에 의거하여 명시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가령 지산겸괘는 참소(讒訴)가 되고 구설(口舌)이 되는즉 이는 주역의 정괘(正卦)와 착괘의 象을 아울러 사용하는 묘함으로써 오늘날 사람들이 오해하게 되는 바를 마침내 명확하게 해소시켰다.
《주역》의 신묘한 문(門)에 임하면 취하는 법이 곳곳에서 왕필에서부터는 象을 쓸어버리고 象에서 벗어나서 《주역》으로 나아갔는데 이를 학자들은 반기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도가 크게 행해졌으나 점차 《易》이 어느 사물로부터 오게 되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부연하면 송대에 이르러서는 象을 논하는 것은 공담(空談)이 되었으니 고로 왕필로부터 그 이후에는 《주역》을 象으로써 해석한 자가 없었으며 이에 계사(繫辭)와 더불어 뜻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대의 이정조、송대의 주한상、오(吳)나라의 초려、명대의 래지덕과 청대에 이르러 한역(漢易)을 강의한 자는 깊거나 혹 얕거나, 자세하거나 간단한 것을 불문하고 모두 능히 《주역》을 象으로 인식하였는데 象으로 말하는 바가 근본을 벗어나지 않으며 더불어 《계사전》에서 말한 바의 큰 근본과 서로 합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무릇 한인(漢人)으로 易象을 주석한 것은 이도평의 《주역집해찬소》와 《초씨역림증주》가 있으며 춘추시대의 사람들이 易象을 말하였던 것은 모두 《좌전》과 《국어》에서 수록하고 있으나 그 주(注)를 능히 해석하지 못하거나 혹은 해석하되 그 주(注)에 오류가 있는 것이 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