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당 난열이 발생하는 때에는 大樂이 따라서 생긴다. 곧 이로 인하여 풍식(風息)을 융섭(融攝)하는 역량、아(阿)자적인 역량、집중적인 역량 및 명점(明點)이 중맥 내의 융화(融化)하는 역량이 되고 있다. 마땅히 이들 구성요소가 전부 모여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때에는 곧 진정으로 교묘하고 능한 힘이 당도한다.
졸화요가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 난열의 본질이 곧 大樂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어떤 심신의 감수(感受)적인 본질이 곧 大樂인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또 응당 대락의 無二、명백함、찬란한 광명、맑고 투명하여 실체가 없음 및 비치는 그림자와 같은 일반적인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데 이와 같이 되면 大樂의 본신이 변하여 無二의 지혜를 이룬다. 이 외에 항상 무이적인 체험에 이를 때에는 마땅히 충만한 大樂적인 특질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일단 우리는 어떤 大樂을 감수(感受)하면 응당 노력하면 無二의 지혜가 생겨난다. 따라서 최초에는 이 점이 곧 중요하다. 이 대락의 본신을 응당 소화하고 전화(轉化)하면 지혜를 이루게 된다. 大樂이 변하여 지혜를 이루고 또 지혜가 변하여 大樂을 이루는데 그렇지 않으면 감수(感受)가 변하여 평범한 희열을 이루며 탐욕과 집망적 폭발이 이루어진다. 만일 大樂과 無二적인 쌍운(雙運)을 적극적으로 건립하면 반드시 이런 종류의 정황적인 위험이 발생되지 않는다. 睜開
만일 「大樂이 결핍된 자아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이해가 없으면서 앉아서 수지(修持)하는 때에는 반드시 체험이 탐욕적인 위험에 저항하기 어렵게 된다. 항상 두 눈에 눈동자가 열리면 마땅히 많은 경지를 마주하게 되며 반드시 일반적으로 자석이 끌어들이는 것과 같으며 이로 인하여 탐욕이 생기게 된다. 만일 졸화요가로 인하여 매우 많은 탐욕을 생산하게 되면 장차 변하여 긴장과 좌절 그리고 충만한 압력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마땅히 어떤 희열적인 체험에 이를 때에는 통상 반드시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되는데 마음의 변화로는 어두움、어찌할 바를 모름、잡아당겨서 나가지 못함 등을 얻는다. 이와 같이 희열이 변하여 하나의 장애를 이루고 방해하면 달리 담장 뒤의 사물이 보이는 법이 없다.
반드시 이런 종류의 정황이 발생하는 까닭에 고로 존재하는 無二의 본질을 이해하기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졸화요가는 반드시 거대한 감각적인 에너지를 생산한다. 따라서 만일 조심하고 근신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에너지의 유입은 없으며 졸화는 반드시 엄청난 탐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응당 환락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응당 환락은 있다. 비록 불가사의한 환락을 느끼나 다만 반드시 무언가에 조종을 당하는데 만일 이와 같이 되면 달리 전화(轉化)하여 청정하고 때 묻지 않는 심각한 지혜를 이루게 된다. 소위 환열을 체험하는 것은 좋으나 다만 달리 지혜로 나아가는 체험적인 유용함이 없다면 이는 즉 착오이다.
탄트라의 유일무이적인 특질은 달리 반드시 남성적인 大樂에너지와 여성적인 지혜에너지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에너지는 반드시 모두 쌍운(雙運)이 쌍으로 생긴다. 따라서 반드시 이 한 점을 확정하는데 노력하여야 하는데 확실히 기억할 것은 정확한 졸화는 응당 大樂과 無二지혜적인 쌍운(雙運)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점을 망각하면 위험해지는데 왜냐하면 졸화요가는 매우 예민한 감각적인 기교가 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