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 마음이 너무 심란하여 설악산을 찾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신흥사를 방문하여 절 내의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애고가 사라지며 도저히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경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굳지 말하자면 우주와 내가 완전하게 하나가 된 충만감이라고나 할까.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가 보인 것도 아니며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멈추었다. 오쇼 라즈니쉬는 깨달음의 단계를 3가지로 구분하였다.
처음 맛보는 경지는 환희심에 겨워 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폭포수의 단계로서 홀딱 벗고 춤을 추었다든가 혹은 마당을 간질환자처럼 떼굴떼굴 뒹굴었다는 자를 나는 그 후에 만나 보았다. 그다음 두 번째 경지는 호수같이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단계로서 인도 타포반에서 만난 힌두교 성자가 아닐까 한다.
대부분 2번째 단계가 너무 좋아서 그냥 눌러 앉지만 마지막 단계는 그곳에서 벗어나서 더 넓은 바다로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최근에 친견한 달라이라마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나는 이전에 어떤 수행도 한 적이 없었으나 이 설악산에서 우연히 공(空)의 문이 열린 것인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접한 공성(空性)은 바로 라즈니쉬가 말한 2번째 내지 3번째 단계인 듯하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상태…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단지 짐작만 할 뿐 “반야심경”이나 “중론”을 아무리 줄줄 외우고 정확하게 해석하여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에 개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짓는 바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20년의 세월 동안 쇠가 빠지게 수행적인 노가다를 하였으나 그때의 공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 체험은 정식 버전이 아닌 1회용 무료 체험판이었나 보다.
현재 그때의 공성적인 체험을 벤치마킹하여 명상할 때 표준으로 삼고 있는데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는 말장난이 아니며 명상은 반드시 자세를 잡고 눈을 감고서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강력하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가진 것에 대하여 감히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수행 중에 이러한 영적 체험은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이 또한 내려 놓아야 할 집착에 불과하며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경우는 수행을 하기 전에 이미 최고의 경지를 미리 경험하고 도리어 그 후 오랜 수행을 하였으나 수행하기 전의 경지를 똑같이 또다시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 의아스러울 뿐이다. 첫 끗발이 개끗발인가 보다. 그 후로 현재까지 명당자리에서 헤딩이나 하면서 다니고 있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