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화요가는 모 종의 지식적인 산물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직접 몸으로 졸화를 체험하기 전까지 이것은 단지 언어나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오직 수법(修法)을 요하며 곧 가히 성취하는 바가 있다. 마땅히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각수(覺受)가 또한 자신을 안내하는데 이와 같이 되면 반드시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이 안전한지 명백해진다.
어떤 경우이든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종객파대사가 해석한 바와 같이 거친 기력이 과다하면 반드시 풍식이 조절을 잃고 착란(錯亂)하여 모든 맥과 풍식을 간섭하는데 이르게 된다. 가볍고 부드럽게 보병기(寶甁氣)를 수련해야 하며 아울러 아자(阿字)를 관수(觀修)하여야 한다. 단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똑바로 깨닫기를 요하며 아울러 또한 내려놓기를 요한다. 장차 어떤 때에 이르면 이 하나의 과정은 반드시 자연스럽되 자스러럽게 발생하니 반드시 집착하거나 지식화할 필요가 없다.
아자(阿字)적인 심각한 각찰(覺察)을 체험하면 과거、현재 혹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잘못、존재 혹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시비를 근심하지 않는다. 단지 지식화로 나아가지 않으면 심각한 깨달음적인 상태 중에 안주한다.
그러나 사실상 졸화요가는 지식화를 아주 배제하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당연히 졸화요가를 강하게 개시하려면 반드시 지식을 운용하여 졸화를 건립하야야 하나 당연히 강하게 개시하려면 반드시 지식을 운용하여 졸화를 건립하야야 한다. 다만 도달하면 반드시 지식의 유희적인 경계에서 멈추고 단지 내려놓고 자신의 체험으로 나가야 한다. 이 때 곧 진정한 졸화의 건립이 있게 된다.
무릇 아자(阿字)의 관수(觀修)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곧 기초적인 수법(修法)이나 다만 풍식이 강력하게 중맥에 진입하도록 하려면 반드시 전문적인 졸화요가를 수지(修持)해야 한다. 그러나 응당 집중력、大樂과 명석함이 전체적으로 모두 온정적인 때에는 이 전문적인 수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이때에는 단지 내려놓기를 요하며 또 아울러 관수(觀修)가 즉시 가능하다.
응당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보병기(寶甁氣)를 운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풍식(風息)을 제륜(臍輪)에서 유지하고 있는 때에는 풍식으로 장차 자연스럽게 중맥 내에서 치열한 졸화가 일어난다. 또 술취한 사람적인 환열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쿤달리니는 반드시 유동하며 장차 大樂을 체험한다.
이는 단지 맥과 맥륜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두루 미치는데 大樂에너지적인 매 하나의 동작이 모두 또한 大樂으로 충만하니 반드시 압력을 가하거나 혹은 어떤 특수한 호흡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매 한 건의 사물이 모두 자연스럽게 발생하니 계속하여 수행하면 곧바로 어떤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