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오늘은 붓다가 설법하였다는 인도의 불교성지 영축산을 올라가는 날이다. 가파른 길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있는데 그 흔한 안내 표지판조차 없다. 앵? 내가 지금 그 유명한 세계적인 불교성지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동일지명의 산을 오르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현지인들이 많이 올라가는데 두 갈래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붓다가 설법했던 곳을 가려면 어느 길이냐고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계속 누구에게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난감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곳에 일본사원 표지판은 버젓이 세워져 있다. 마침 한 사람이 우측으로 가면 된다고 일러준다. 그런데 그 많은 현지인은 모두 좌측의 일본사원 방향으로 올라가며 우측으로 가는 것은 나밖에 없다.
“진짜 여기가 그 유명한 영축산일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막상 정상에 올라가니 역시 아무도 없다. 한적하다. 오히려 적막감이 감돌며 왠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든다. 일단 자리 잡고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는데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마음의 집중이 안 된다. 오히려 집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명상하는 것만 못하다. 왜일까?
붓다의 설법을 들을만한 자격이 안되는 놈이 기어올라와서 개폼잡고 앉아 있어서 그럴까? 인도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 계속 개기고 있었으나 역시 잡념에만 휘둘린다. 불법의 향기를 맡으려고 왔건만 더 이상 버틸 의욕을 상실하여 하산하는데 도중에 웬 조그만 동굴이 보인다.
그런데 왠지 그곳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들어가서 한번 앉아 있어 보았다. 앉자마자 강력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며 바로 삼매에 진입한다. 그전까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기운이다. 대개 동굴은 음산하고 습한 기운이 감도는 법인데 이런 오묘한 기운이 스며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명상하며 느낀 환희심이 되살아난다.
난 역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조용히 찌그러져서 행하는 동수굴수행이 딱 맞나 보다. 요즈음 영축산 사진을 보니 올라가는 계단도 잘 만들어져 있고 정상에는 불상을 안치하였으며, 꽃들로 도배하였으며 또한 참배객들로 북적인다. 예전과 너무 다르다.
내가 방문한 당시는 아무런 인공적인 조성물이 없었으며 오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미가 살아있었는데
근래에 개발 위주의 황금만능주의적인 천박한 자본주의 물결로 인하여 불교성지랍시고 관광지화하여 보다 많은 사람이 편리하게 찾아오도록 하여 이익 창출을 노리는 그 상업화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사실상 요즈음은 예전과 달리 먹고 살만하니 국제화 내지 여행자유화에 더하여 교통시설의 편의로 인하여 명산대천과 종교 성지는 어디가나 참배객과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내가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대개 동양인은 오직 일본인 밖에 없었으며 명상할 만한 명당을 관광상품화하지 않은 장소도 많았으나 지금은 갈수록 그런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여담인데 그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르에서 버스를 탔는데 인도의 버스는 3석이 붙어있다. 내가 버스에 타니 아무도 없었으며 잠시 가다가 어느 인도 여성이 탔는데 하필 내 옆에 옆에 앉더니만 다시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자신의 허벅지와 장딴지 및 어깨를 나한테 완전히 밀착한다. 버스가 코너를 돌때 나보다 몸집이 더 큰 여자가 얼마나 심하게 나한테 몸을 기대는지 내 몸이 기울어지면서 하마터면 내 어깨로 창문 유리창을 깨뜨릴 뻔하였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하고 고개를 돌려서 보니 30대 초반 여성인데 자기도 당당하게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음란한 눈빛이 아닌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맑고 평온하며 고요한 눈동자이다. 오히려 분별심이 일으킨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당시에는 그 황당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 여성이 왜 그랳는지 그리고 전생에 우리가 어떤 인연이었는지 짐작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