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교는 불교철학이라고 칭한다. 이는 불법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공성의 지혜나 삼매의 경지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근대 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라고 공언하였는데 불교는 철학이자 더불어 종교적인 속성이 있기에 제한된 언어로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별로 아는 바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불교는 철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생성된 종교이며 이로 인하여 대중들의 깊은 신심을 우러나게 하는 것이다. 원래 논픽션이 보다 진한 감동을 주듯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3만독 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하고 깨닫지 못하면 말짱 공염불이다.
무릇 삼매에 대하여 여러 설명이 있다. 간단하게 의식의 흐름을 끊고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실상 실상이 없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집중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마음의 집중은 저절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통제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호흡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 몸은 또한 실상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니 오히려 이 육신이 바로 전체 우주이며 소 우주가 되니 호흡을 통하여 중맥이 열리면 삼매는 자연히 따라온다.
따라서 삼매에 쉽게 진입하려면 뚬모수행을 해야 한다. 지난 10 몇 년 동안은 좌선하고 명상에 들어가서 1시간 정도 있어봐야 진정한 삼매에 진입하는 것은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뚬모수행을 하면서 중맥이 열리고 중맥을 통하여 단전에서 부터 영열이 위로 올라가서 정륜에 이르면 무한한 공성이 느껴지며 다시 생식륜까지 내려오면 지복감을 초월하는 오르가즘이 느껴졌다.
위로는 공성 그리고 아래로는 더할 수 없는 오르가즘…. 다시 정륜으로 올라가면 이 양자가 합쳐서 온몸을 휘감으니 손발은 전기에 감전되듯 찌릿하며 무아(無我)적인 상태에 진입한다. 잠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러한 쾌락적인 감각은 점차 명상을 하지 않는 평상시에도 돌연히 찾아온다.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중맥을 여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수승한 상근기라면 모를까 아니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한 두 달 시도하다가 금방 포기하는 수련자가 많은데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리 애써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듯 지루하고 어렵게 만 느껴지나 하루하루 같은 걸음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중맥이 개통되며 삼매에 들어가게 되며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엄청난 희열과 공성이 느껴진다. 아마 세간에서 이 보다 더한 즐거움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삼매를 탐익하는데 중독되는 수행자가 종종 있다.
이에 붓다께서는 오히려 삼매에 드는 것을 지옥에 들어가는 것같이 여기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는 아마도 자리적인 수행에 만족하는 성문에서 대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신 듯하다. 또한 반야의 지혜가 없는 단지 삼매 만으로는 반쪽 짜리 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을 거듭할 수록 삼매에 익숙해지며 나중에는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만약 그대가 대승불교적인 거창한 중생구제에 뜻을 두지 않고 단지 성문승같이 삼매 만을 추구한다면 이 정도 경지에 이르러도 만족할 것이다.
참고로 나와 같은 종류의 하근기도 홀로 수련하여 몇 년 내에 중맥을 열고 삼매에 들고 있으니 여러분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빠른 시간 내에 삼매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진정한 삼매에 들게 되면 왜 수련자들이 여기에 중독(?)되는지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