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고시에 실패하고 국민은행에 잠시 들어가서 일한 적이 있다. 지점에서 1년 근무 후에 바로 본점으로 발령이 났다. 그 당시는 본점에 근무하면 남들보다 승진이 빠른 시기여서 아마도 무난하게 지점장까지는 올라갔을 것이며 지금 쯤 방구석에 앉아서 골프채나 손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몇 달 뒤 퇴직한 후 현재까지 비바람을 맞으며 수행한답시고 국내외의 산천을 좀비같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심각한 몸 고생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마음은 오히려 갈수록 편안해진다. 현재 나는 일개 점쟁이에 불과하다. 종교인이 아니라서 근엄한 척 할 필요가 없고 학자도 아닌지라 품위유지를 하느라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으며, 제자가 없으니 가오 잡을 일도 없고 정치인이 아닌지라 말실수를 할까 조심하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만 그저 방안에 나자빠져서 글이나 쓰고 수행이나 할 뿐이니 자유롭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해지는 것을 꺼려한다. 또한 번뇌는 기필코 끊으려고 하며 또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번뇌가 있음으로써 느슨한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번뇌로 인하여 내면적인 성찰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정신적인 살림살이가 늘어나게 된다. 고요하고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곳이 좋은 수행처가 아니라 번뇌가 곧 자신의 수행을 도와주는 도반이며 멋진 수행도량이다.
번뇌는 오직 철저하게 뿌리 뽑아야 하며 또 확실하게 끊어 없애야 하는 혐오스러운 대상이 아니다. 《유마경》 중에서도 번뇌를 가지고도 삼매에 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무리 인적 드문 곳에 있더라도 마음이 어지러워서 번뇌와 망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면 마음의 집중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서 통제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이 의식을 흐름으로 인하여 혹자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혹은 미래의 불안감에 시달리며 혹은 갑작스러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범죄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이러한 번뇌망상을 어찌 처리해야 할까?
그 답은 명상에 있다. 무의식으로 인한 문제를 인위적인 의식으로서 다루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접근방법이다. 머리로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명상 중에서도 뚬모명상은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이며 이는 실제 몸으로 체험하는 실전명상이다.
수많은 주옥같은 글귀를 머릿속에 담고 있어도 정작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다면 전부 공염불에 불과하다. 특히 뚬모명상 중에 뜨거운 영열이 온몸을 휘감으면 삼매에 들어가면서 공의 세계에 빠져들며 그에 머무르는 동안은 완전한 무아(無我)의 상태가 되고 의식의 흐름은 정지하며 번뇌망상은 서서히 녹아내린다. 그리고 명상하지 않는 일상 중에서도 그 뚬모적인 온기가 남아서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명상에 집착하는 것 또한 하나의 욕심이다. 그리하여 《유마경》에서도 선정(禪定)적인 희열에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것은 곧 보살의 얽매임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무릇 번뇌에 사로잡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오히려 번뇌를 반가운 손님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이 번뇌를 통하여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을 한다면 반드시 또 다른 정신적인 자유를 얻게 되리라.
점점 다가오는 AI시대를 맞이하여 앞으로는 모든 분야에서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또한 로봇이 극도로 진화하면 인간의 표정과 눈동자를 스캔하여 그에 대한 감정이나 심리상태 등 모든 정보를 곧바로 인식하며 《터미네이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듯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로봇의 성능이 향상되어 모든 분야를 장악할지라도 영적인 영역과 명상적인 영역은 넘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봇은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도 명상을 흉내 낼 수는 있으리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명상은 각종 종교마다 모두 행하고 있으며 사실상 특별한 형식은 없다. 남녀노소, 복장, 국가, 장소, 자세는 각각 달라도 마음의 집중이 되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