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를 보았는데 매우 인상적인 기억이 남아 있어서 한번 찾아가서 명상을 하려고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날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옛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였다.
프랑스에서 스위스행 4인실 침대칸 기차를 탔는데 바로 맞은 편 침대칸에 영국사람이 어디까지 가냐고 묻길래 스위스에 간다고 하였다. 대화는 그 한마디로 끝났고 피곤해서 바로 골아 떨어졌다.
그런데 아침에 그 영국사람이 깨우면서 이 역이 바로 스위스라고 말하는데 기차는 막 출발하려고 기적을 울린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배낭을 낚아채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기차 밖으로 뛰쳐 나왔다.
휴…만약 그 영국사람이 깨우지 않았다면 하마트면 다음 역인 이탈리아까지 갈 뻔 하였다. 중국은 기차를 타면 도착지 바로 전 역에서 역무원이 찾아와서 실물티켓을 돌려주는데 유럽열차는 뭐가 이래?
알프스산 중에서 접근하기가 비교적 쉬운 융프라우를 선택하고 인터라켄으로 가서 어렵게 숙소를 찾아가니 남녀혼숙 도미토리였다. 나참 불편하게시리….
그런데 유럽 중에서도 스위스는 살인적인 물가로 인하여 다른 곳을 찾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 당시에는 넓은 방에 여러 개의 4인용 나무침대가 비치되어 있고 그 평평한 나무침대 위에서 4사람이 이불을 깔고 자는 시스템이었다. 군대 내무반도 아니고 싼티가 찬란하다.
각자 발을 마주하고 자는 구조였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니 같은 침대 맞은 편에는 마침 우리나라의 신혼부부같이 보이는 커플이었으며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바로 잠들었다.
새벽에 누가 내 발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잠이 깨었는데 잠결에 몸부림치다가 그리 하는가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발이 간지려워서 다시 깨어났는데 연속으로 은근하게 내 발바닥을 발가락으로 비비고 있는 것이 이건 완전히 의도적이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도 아닌데 이런 짓을 하다니 이런 변태같은 놈을 다 봤나? 만약 무좀이라도 옮기면 어쩌려고…. 갑자기 기분이 확 다운되며 분노게이지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바라보니 뜻밖에 맞은 편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드러누워 있지 않은가? 분명히 자기 전에 맞은 편에는 남자였는데 이것들이 언제 자리를 바꾸었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니 웬지 그 감촉이 부드러웠고 결코 기분나쁜 것이 아닌듯 하였다.
원효대사가 목이 말라서 간밤에 바가지물을 감미롭게 들이키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것이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구토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데 나 또한 그와 비슷하게 현재의 마음이 바뀌니 그에 따라 과거의 기억이 조작되는 것을 느낀 셈이다.
《화엄경》에서 설파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바로 이것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대개 인간은 눈에 비치는 사물도 관심이 없으면 뇌로 전달되지 못하여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을 하지 못하며 때론 자신이 보기를 원하는 사물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면 도리어 헛 것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의 느낌까지 자신의 마음이 변함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니 이젠 나의 오감(五感)도 믿을 바가 못되고 수시로 변하는 이 마음도 의지할 바가 못되니 이젠 무엇에 마음을 붙여야 하나?
융프라우로 가기 위하여 산악열차를 탔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정상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가니 한 여름인데도 이곳은 매서운 바람에 이빨이 덜덜 떨리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도저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작 지금과 같은 뚬모수행을 했더라면 그 정도 추위야 대수롭지 않았을텐데 두번 다시 가기 힘든 그 좋은 곳에 가서 쫓기다시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잠시동안이었지만 알프스산같이 기운이 맑고 깨끗한 곳은 그 후로 세계 어디에도 내 경험상 없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융프라우 정상의 강추위와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며 한 몇 시간 정도 자빠져서 명상을 하고 싶다.
자연은 인간과 달리 우리에게 단지 조건없이 즐거움을 줄 뿐 그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으니 내 어찌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쏜가? 인간의 감정은 히말라야산의 기후와 같이 수시로 변화하나 산의 형상은 언제나 변함없고 또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니 늘 가까히 하고 싶고 또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아….말하다 보니 다시 산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