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에 대략 그 면적이 우리나라의 5%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긴 협곡인 그랜드 캐넌을 방문하였다. 나는 일반 여행객처럼 대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氣)를 받기 위하여 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할 시에 직원이 수 차례 내 얼굴과 여권을 번갈아 대조하더니 “원더풀”을 연속으로 외친다. 아마 그네들 기준으로 볼 때 내 나이보다 한 15년 내지 20년은 젋게 보여서 그랳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동안의 비결이 뭐냐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원래 도를 닦는 도인은 점차 얼굴이 동안이 된다고 하니 도를 닦으라고 권한다. 물론 나는 도인도 아니면서 마치 샘플만 챙긴 것과 다름 없지만….
밤에 시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도착할 역으로 한 정거장을 가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확인해 보니 그 지하철은 수도권 전철로서 시내가 아니라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맙소사! 이미 밤 10시가 가까워지는데 전철은 멈출 줄을 모른다.
혹시 이러다가 전철이 끊기면 어찌 돌아가야 하나?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순간 갑자기 중간좌석 쯤에서 고함을 크게 지르며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여러 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이와 더불어 창문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에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나면서 일시에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연결통로쪽에 서 있었는데 돌아보니 내막은 잘 모르겠으나 웬 놈들이 싸우다가 서로 총격전을 벌인 것 같다. 혹 유탄을 맞거나 총기난사를 당할 우려에 공포에 질린 주변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서 그 칸을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치는데 미국 전철은 우리나라와 달리 칸 사이를 이동하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달려와서 잠긴 문을 두드리면서 다른 칸을 처다보며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였고 혹자는 차안에 비치된 인터폰으로 절규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혹은 바닥에 엎드리는 자도 있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 공포의 도가니에 휩쓸려서 나도 갑자기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다가 문득 다시 느긋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장면을 액션 내지 호러 영화로 찍으면 절대로 NG는 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나는 평소에 겁이 많은 편이나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헐크같이 나도 모르게 대범한 성격으로 변한다.
그 총질 덕분에 전철은 조금 가다가 급정차하였고 이미 밖에는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전철문이 열리자마자 총질한 놈들은 이와 동시에 곧바로 뛰쳐나갔으며 이어서 놀랐던 승객들이 미친듯이 우루루 내린다. 그리하여 나도 같이 내렸는데 그곳은 전철역도 아닌데도 다친 사람이 있었는지 잠시 후에 반대편에서 오던 전철이 그 곳에서 정지하였다. 그 전철을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거의 11시가 다 되었다. 지루하지 않은 알찬 하루였다.
그랜드 캐넌에 도착하여 공원내에 설치된 텐트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는데 새벽이 되니 이빨이 시릴 정도로 추웠으나 아침 공기는 매우 상쾌하였다. 트레킹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서 협곡으로 내려가지는 않았으며 위에서 협곡을 굽어보며 명상을 하였는데 협곡을 뒤덮은 붉은 바위에서 웬지 엄청난 기가 느껴진다.
무릇 강력한 기(氣)는 역시 바위 그것도 붉은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세도나, 페트라, 시나이산이 모두 붉은 바위산이었으며 그 강력하고 영적인 기운은 다른 산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협곡으로 기어내려가 멋진 동굴을 찾아서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며 명상을 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미련이 남아 있어서 내 홈페이지의 표지사진으로 그랜드 캐넌을 올려놓았으며 볼 때마다 마음으로나마 그곳에 가서 태고적 고요함에 휩싸여 명상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